인성교육을 위한 시
정지용시
햇살수풀
2006. 7. 14. 11:13
■시 감상하기 ■
※ 목차 ※
1. 인동차(忍冬茶) 2. 백록담(白鹿潭)-한라산 소묘- 3. 비 4. 카페·프란스 5. 향수(鄕愁) 6. 말 7. 유리창(琉璃窓) -1- 8. 그의 반 9. 고향(故鄕) 10. 난초(蘭草) 11. 바다 1, 2, 3, 4, 5, 6 12. 구성동(九城洞) 13. 장수산(長壽山) 1, 2 14. 춘설(春雪) 15. 호수(湖水) 1, 2 16. 다알리아 17. 붉은 손 18. 비로봉 19. 산엣 색시 들녘 사내 20. 석류 21. 슬픈 기차 22. 조약돌 23. 풍랑몽(風浪夢) 1, 2 24. 피리 25. 해협 26. 그대들 돌아오시니 27. 홍춘(紅椿) 28. 홍역(紅疫) 29. 홍시 30. 해바라기씨 31. 할아버지 32. 태극선(太極扇) 33. 촉불과 손 34. 종달새 35. 저녁 해ㅅ살 36. 이른봄 아침 37. 오월소식(五月消息) 38. 밤 39. 바람 40. 신석정 시인이 본 정지용
☞ 인동차(忍冬茶) ☜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백록담(白鹿潭)-한라산 소묘- ☜
* 1 *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 2 *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 3 *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壻?)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 4 *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5 *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尺)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 6 *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 7 *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 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 8 *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石 )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어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 9 *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 비 ☜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카페·프란스 ☜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ㄹ[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향수(鄕愁)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말 ☜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유리창(琉璃窓)-1- ☜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그의 반 ☜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 고향(故鄕)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난초(蘭草) ☜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 바다 1, 2, 3, 4, 5, 6 ☜
* 바다-1- * 오 오 오 오 오 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 오 오 오 오 오 연달아서 몰아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젔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 바다-2- *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 바다-3- * 외로운 마음이 한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 바다 위로 밤이 걸어온다. * 바다-4- * 후주근한 물결 소리 등에 지고 홀로 돌아가노니 어데선지 그 누구 씨러저 울음 우는 듯한 기척. 돌아서서 보니 먼 등대가 반짝반짝 깜박이고 메기 때 끼루룩 끼루룩 비를 부르며 날어간다. 울음우는 이는 등대도 아니고 갈메기도 아니고 어덴지 홀로 떠러진 이름 모를 스러움이 하나. * 바다-5- * 바독돌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 그러나 나는 푸른 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바독돌은 바다로 각구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신기한가 보아. 당신도 인제는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귀를 들어 팽개를 치십시요. 나라는 나도 바다로 걱구로 떠러지는 것이, 퍽은 시원해요. 바독돌의 마음과 이 내 심사는 아아무도 모루지라요. * 바다-6- *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흰 물결 피어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꾸 자꾸 내려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움켜잡아 고 빨간 살 뺏으려고. 미역잎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래꽃빛 조개가 햇살 쪼이고, 청제비 제 날개에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속속들이 보이오. 청댓잎처럼 푸른 바다 봄 꽃봉오리 줄등 켜듯한 조그만 산으로―하고 있을까요. 솔나무 대나무 다옥한 수풀로―하고 있을까요. 노랑 검정 알롱달롱한 블랑키트 두르고 쪼그린 호랑이로―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데불고 흰 연기 같은 바다 멀리 멀리 항해합쇼.
☞ 구성동(九城洞) ☜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 장수산(長壽山) 1, 2 ☜
* 장수산(長壽山)-1- *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장수산(長壽山)-2- * 풀도 떨지 않는 돌산이오. 돌도 한덩이로 열두골을 고비고비 돌았세라. 찬 하늘이 골마다 따로 씨우었고 얼음이 굳이 얼어 디딤돌이 믿음직 하이. 꿩이 가고 곰이 밟은 자욱에 나의 발도 노이노니 물소리 귀뚜리처럼 직직하놋다. 파락마락하는 햇살에 눈위에 눈이 가리어 앉다. 흰 시울 알에 흰 시울들이 다치지 안히! 나도 내던져 앉다. 일찌기 진달래 꽃 그림자에 붉었던 절벽 보이한 자리 위에!
☞ 춘설(春雪) ☜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호수 1, 2 ☜
* 호수(湖水) -1- *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 호수(湖水) -2- *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 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 다알리아 ☜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 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돌아 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 나오는 다알리아.
☞ 붉은 손 ☜
어깨가 둥글고 머릿단이 칠칠히, 산에서 자라거니 이마가 알빛같이 희다 검은 버선에 흰 볼을 받아 신고 산과일처럼 얼어 붉은 손, 길 눈을 헤쳐 돌 틈에 트인 물을 따내다. 한 줄기 푸른 연기 올라 지붕도 햇살에 붉어 다사롭고, 처녀는 눈 속에서 다시 벽오동 중허리 파릇한 냄새가 난다. 수줍어 돌아 앉고, 철 아닌 나그네 되어, 서려오르는 김에 낯을 비추우며 돌 틈에 이상하기 하늘 같은 샘물을 기웃거리다.
☞ 비로봉 ☜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산맥 위의 가을ㅅ길 -- 이마바르히 해도 향그롭어 지팽이 자진 마짐 흰 돌이 우놋다. 백화 홀홀 허울 벗고 꽃 옆에 자고 이는 구름 바람에 아시우다.
☞ 산엣 색시 들녘 사내 ☜
산엣 새는 산으로, 들녘 새는 들로. 산엣 색시 잡으러 산에 가세. 작은 재를 넘어서서, 큰 봉엘 올라서서, '호―이' '호―이' 산엣 색시 날래기가 표범 같다. 치달려 달아나는 산엣 색시, 활을 쏘아 잡었습나? 아아니다, 들녘 사내 잡은 손은 차마 못 놓더라. 산엣 색시, 들녘 쌀을 먹였더니 산엣 말을 잊었습데. 들녘 마당에 밤이 들어, 활 활 타오르는 화톳불 너머 넘어다 보면― 들녘 사내 선웃음 소리 산엣 색시 얼굴 와락 붉었더라.
☞ 석류 ☜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열매를 쪼기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알 두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ㅅ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조름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일일이 비추어 보며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 슬픈 기차 ☜
우리들의 기차는 아지랑이 남실거리는 섬나라 봄날 온 하루를 익살스런 마도로스 파이프를 피우며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 소 걸어가듯 걸어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노오란 배추꽃 비탈밭 새로 헐레벌떡거리며 지나 간 단 다.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마음만은 가벼워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휘파람이나 날리자. 먼 데 산이 군마처럼 뛰어오고 가까운 데 수풀이 바람처럼 불려 가고 유리판을 펼친 듯, 뇌호내해 퍼언한 물 물. 물. 물. 손가락을 담그면 포도빛이 들으렷다. 입술에 적시면 탄산수처럼 끓으렷다. 복스런 돛폭에 바람을 안고 뭇 배가 팽이처럼 밀려가다 간,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옥토끼처럼 고마운 잠이나 들자. 청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고달픈 뺨이 불그레 피었다, 고운 석탄불처럼 이글거린다. 당치도 않은 어린아이 잠재기 노래를 부르심은 무슨 뜻이뇨? 잠들어라. 가여운 내 아들아. 잠들어라. 나는 아들이 아닌 것을, 웃수염 자리 잡혀가는, 어린 아들이 버얼써 아닌 것을. 나는 유리쪽에 갑갑한 입김을 비추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나 그시며 가 자. 나는 느긋느긋한 가슴을 밀감쪽으로나 씻어 내리자. 대수풀 울타리마다 요염한 관능과 같은 홍춘이 피맺혀 있다. 마당마다 솜병아리 털이 폭신폭신하고, 지붕마다 연기도 아니 뵈는 햇볕이 타고 있다. 오오, 개인 날씨야, 사랑과 같은 어질머리야, 어질머리야. 청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가여운 입술이 여태껏 떨고 있다. 누나다운 입술을 오늘이야 실컷 절하며 갚노라.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오오, 나는 차보다 더 날아가려지는 아니하련다.
☞ 조약돌 ☜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첫길에 고달픈청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 오르는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 풍랑몽(風浪夢) 1, 2 ☜
* 풍랑몽(風浪夢) -1- *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울음 바다를 안으올 때 포도빛 밤이 밀려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 건너 외딴 섬, 은회색 거인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창 밖에는 참새 떼 눈초리 무거웁고 창 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 때, 은고리 같은 새벽달 붓그럼성스런 낯가림을 번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외로운 조름, 풍랑에 어리울 때 앞 포구에는 궂은 비 자욱히 들리고 행선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 풍랑몽(風浪夢) -2- * 바람은 이리도 몹시도 부웁는데 저 달 永遠의 燈火 ! 꺼질 법도 아니 하옵거니 엇저녁 風浪 우에 님 실려 보내고 아닌 밤중 무서운 꿈에 소스라쳐 깨옵니다.
☞ 피리 ☜
자네는 인어를 잡아 아씨를 삼을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따뜻한 바다 속에 여행도 하려니. 자네는 유리 같은 유령이 되어 뼈만 앙사하게 보일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풍선을 잡어타고 화분 날리는 하늘로 둥둥 떠오르기도 하려니. 아무도 없는 나무 그늘 속에서 피리와 단둘이 이야기하노니.
☞ 해협 ☜
포탄으로 뚫은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나려앉어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어족이 행렬하는 위치에 흣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ㅅ속 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각적을 불고 -- 해협 오전 두시의 고독은 오붓한 원광(圓光)을 쓰다. 서러울 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자.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날 항구의 개인 날세여!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매쯤 한밤의 태양이 피어오른다.
☞ 그대들 돌아오시니 ☜
-재외 혁명동지에게-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밭 이랑 문희우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 하올 가음마저 없어 금의(錦衣)는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 일가 친척 흩어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구르는 백골! 상기 불현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 외오 : '잘못'의 옛말. * 자휘(字彙) : 글자의 수효, 여기서는 이름을 의미함. * 문희우고 : 무너뜨리고. * 가음 : 감. 재료나 바탕. * 융의 : 옛날 군복의 한 가지.
☞ 홍춘(紅椿) ☜
청나무 꽃 피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춤에 뜻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조름조는 마을길에 고달퍼 아름아름 알어질 일도 몰라서 여읜 볼만 만지고 돌아오노니.
☞ 홍역(紅疫) ☜
石炭 속에 피여 나오는 太古然히 아름다운 불을 둘러 十二月밤이 고요히 물러 앉다. 琉璃도 빛나지 않고 窓帳도 깊이 나리운 대로...... 門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 떼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紅疫이 척촉처럼 爛漫 하다.
☞ 홍시 ☜
어적게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웨 앉었나. 우리 옵바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 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해바라기씨 ☜
해바라기씨를 심자 담 모로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 나면 이실이 나려와 가치 자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해ㅅ빛이 입마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 지르고 간 놈이 -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 할아버지 ☜
할아버지가 담배ㅅ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다시니, 가믄 날도 비가 오시네.
☞ 태극선(太極扇) ☜
이 아이는 고무뽈을 따러 힌 山羊이 서로 부르는 푸른 잔디 우로 달리는 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범나비 뒤를 그리여 소소라치게 위태한 절벽 갓을 내닷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내처 날개가 돋혀 꽃잠자리 제자를 슨 하늘로 도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내 무릎 우에 누은 것이 아니라) 새와 꽃, 인형 납병정 기관차들을 거나리고 모래밭과 바다, 달과 별 사이로 다리 긴 王子처럼 다니는 것이려니, (나도 일즉이, 점두룩 흐르는 강가에 이 아이를 뜻도 아니한 시름에 겨워 풀피리만 찢은 일이 있다) 이 아이의 비단결 숨소리를 보라. 이 아이의 씩씩하고도 보드라운 모습을 보라. 이 아이 입술에 식드린 박끛 웃음을 보라. (나는, 쌀, 돈셈, 집웅 샐 것이 문득 마음키인다) 반디ㅅ불 하릿하게 날고 지렁이 기름불만치 우는 밤, 모와드는 훗훗한 바람에 슬프지도 않은 태극선 자루가 나붓기다.
☞ 촉불과 손 ☜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 듯이 올뺌이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틈에 물을 따오다, 산양릐 젓을 옮기다, 簡素한 菜蔬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薔薇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 종달새 ☜
삼동 내 -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 지리리…… 웨 저리 놀려 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웨 저리 놀려 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홀로 놀자.
☞ 저녁 해ㅅ살 ☜
불 피여으르듯 하는 숲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곺아라. 수저븐 듯 노힌 유리컾 바쟉바쟉 씹는대도 배곺으리. 네 눈은 高慢스런 黑단초 네 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 점. 빨어도 빨어도 배곺으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해ㅅ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곺아라.
☞ 이른봄 아침 ☜
귀에 설은 새소리가 새여들어와 참한 은시계로 자근자근 얻어맞은 듯, 마음이 이일 저일 보살핀 일로 갈러저, 수을방울처럼 동글동글 너동그라저, 춤기는 하고 진정 일어나기 싫어라. * 쥐나 한마리 훔켜 잡은 듯이 미다리를 살포---시 열고 보노니 사루마다 바람으론 오호 ! 치워라. 마른 새삼넝쿨 새이새이로 빠알간 산새새끼가 몰래ㅅ북 드나들 듯. * 새새끼와도 언어수작을 능히 할까 싶어라. 날카롭고도 보드라운 미음씨가 파다거리여. 새새끼와 내가 하는 에스페란토는 휘파람이라. 새새끼야, 한종일 날어가지 말고 울어나 다오, 오늘 아침에는 나이 어린 코끼리처럼 외로워라. * 산봉오리 --- 저쪽으로 돌린 푸로우 피일---- 페랑이 꽃으로 불그레하다, 씩 씩 뽑아 올라간, 밋밋하게 깎어 세운 대리석 기둥인 듯, 간ㅅ뎅이 같은 해가 익을거리는 아침 하늘을 일심으로 떠바치고 섰다. 봄ㅅ바람이 허리띄처럼 휘이 감돌아서서 사알랑 사알랑 날어오노니, 새새끼도 포르르 포르르 불려 왔구나
☞ 오월소식(五月消息) ☜
梧桐나무 꽃으로 불밝힌 이곳 첫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 어린 나그내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여오려니. 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 네가 남기고 간 記憶 만이 소근소근 거리는구나. 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黃海가 남실거리나니. ......나는 갈메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 快活한 오월 넥타이가 내처 난데없이 順風이 되여, 하늘과 딱닿은 푸른 물결 우에 솟은, 외따른 섬 로만튁을 찾어갈가나. 일본말과 아랍아 글씨를 아르키어 간 쬐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이야, 날마다 밤마다 섬둘레가 근심스런 風浪에 씹히는가 하노니, 은은히 밀려 오는 듯 머얼리 우는 오ㄹ간 소리......
☞ 밤 ☜
눈 머금은 구름 새로 힌 달이 흐르고, 처마에 서린 탱자나무가 흐르고, 외로운 축불이, 물새의 보금자리가 흐르고..... 표볌 껍질에 호젓하이 쌓이여 나는 이밤, '적막한 홍수'를 누어 건늬다.
☞ 바람 ☜
* 바람 * 바람 속에 薔薇가 숨고 바람 속에 불이 깃들다 바람에 별과 바다가 씻기우고 푸른 뫼ㅅ부리와 나래가 솟다. 바람은 音樂의 湖水 바람은 좋은 알리움! 오롯한 사랑과 眞理가 바람에 玉座를 고이고 커다란 하나와 永遠이 펴고 날다 * 바람 *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가 좋으냐? 내사 왼통 빩애졌네. 내사 아므치도 않다. 호 호 칩어라 구보로 !
☞ 신석정 시인이 본 정지용 ☜
며칠 뒤 나는 견지동 시문학사를 찾아갔다. 주인 박용철 씨를 만나 한참 이야기하는 판에 얼굴이 검은데다가 검정 명주 두루마기를 입은 시골양반 타입의 한 사람과 양복입은 사람이 뒤따라 들어왔다. 바로 이 시골양반이 정지용씨였고 한분은 이순석이라는 화가였다. 이윽고 그 자리에 술이 웬만치 된 후 이순석이라는 화가는 연거퍼 파리로 가야겠다고 말하며 자리가 한창 흥겨워졌을 즈음 지용씨는 시낭송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들은 씨(氏)의 시낭송이다. 처음에 읊은 시가 향수였으나 그때 나는 어떻게 기뻤던지 모른다. 뒤이어 씨는 내 시원고를 들더니 조금도 서슴치 않고 읊어가는게 마치 부진장강요요래(不盡長江遼遼來)의 그것이었다. 시에 능한 지용씨를 발견한 것은 일찍이 '조선지광'에서 였거니와 시낭송에 또한 능한 지용씨를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날 밤의 씨의 그 허식없는 인상을 영원히 잊을 날이 없을 것이다. 신석정, 조지훈론 (풍림 5호, 1937년 4월) 음악:Moldova-Sergei Trofa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