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수업자료

사바나는 비를 먹고 부활한다.

햇살수풀 2006. 5. 9. 13:49
 비를 먹고 부활한다

목은 타들어가고 무서운 기세로 흙바람이 휘몰아 치는 건기의 마지막 시기…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면 하루만에 들판은 초록빛이 되고 청명함이 찾아와

▣ 김정미 여행전문가·지호,지민 엄마 babingga@hotmail.com

바람이 분다. 오늘도 흙바람이 분다. 거리를 나서면 먼지폭풍이 일고 오후에 더욱 세지는 바람은 온 땅의 흙을 하늘로 끌어올려 몸으로 집안으로 퍼부어댄다. 모든 걸 날려버리겠다는 듯이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친다. 온 하늘을 뿌옇게 덮는다. 거리를 나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등을 버티고 서서 흙먼지를 막는다.

생명은 어디에 씨를 숨겨 놓고 있을까

탄자니아의 2월은 건기의 마지막 시기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건조하고 어딜 가도 물이 없다. 온몸은 먼지투성이고 목은 타들어가 하루하루 물을 기다려야만 한다. 바짝 마른 땅은 약간의 바람에도 심한 먼지폭풍을 일으키고 그 먼지는 휘날려 하늘의 자외선을 막아버린다. 어서 빨리 3월이 와야 될 텐데….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는 대(大)우기에는 세 달 정도, 소(小)우기에는 한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비가 퍼붓는다. 탄자니아의 해안지대는 인도양에서 불어온 계절풍으로 고온다습하지만, 대부분은 고온건조한 사바나 고원지대다. 아루샤는 내륙의 1400m에 위치한 고지대라서 사바나 기후로 분류된다. 기온차가 심하고 강우량도 해안지대보다 적은 편이다. 이곳은 1년에 두 번, 3월에서 5월의 대우기와 10월 초의 소우기가 있다.


△ 마른 사바나의 땅은 소떼의 행렬에 뿌연 먼지로 답한다. 우기를 알리는 첫 비는 이 모든 먼지를 씻어낸다.

일반적인 아프리카의 우기는 대체로 9월 말이나 10월 초쯤 시작되는데, 우기라고 해서 계속 비가 내리는 건 아니다. 이후 찾아오는 건기는 우기에 내린 비가 점점 말라가면서 사바나의 초원을 이루는 시기다. 사바나 지대에는 아카시아 나무 등이 많고, 내륙에 있는 초원으로 갈수록 건조한 날씨에 견딜 수 있는 줄기가 두꺼운 바오바브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비만 내리면, 길이 모두 진흙탕이 되더라도 아이들의 기침은 멈출 것이고 거리의 우물물도 시원한 물을 쏟아낼 것이다. 온 하늘을 뒤덮은 먼지는 일시에 걷히고 상쾌한 수분으로 모두에게 청명함을 건네주겠지. 그렇게 우리 모두는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심정으로 하루하루 간절하게 비를 기다린다. 비가 정말 그립다. 나도 건조한 날씨 탓에 눈이 아픈데 다행히 지호와 지민이는 건강하다. 이깟 먼지는 공해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생하다.

이곳에 와서 두 번의 건기를 모두 경험했다. 2005년 7월 서울을 떠나 이곳 아루샤에 정착한 지난해 10월에도 이랬다. 소우기의 시작인 10월, 첫 비가 쏟아지자 마법처럼 학교 아이들의 감기가 일시에 그쳤다. 하늘은 드높게 푸르러져 어디나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 흙냄새 가득하던 공기는 물기 머금은 상쾌한 향기를 뿜어냈다. 정말 비가 내린 지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다. 서울도 비가 내리면 이럴까? 이곳에 오니 별별 감상에 다 젖어본다.

장마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바뀐다. 비는 주룩주룩 시원하게도 쏟아진다. 아프리카에서 맞는 장마는 낭만적이다. 천둥이 치고 세찬 바람이 불고 쾅쾅 번개도 친다. 장마는 땅을 온통 적시고도 모자라 진흙투성이로 만든다. 동남아시아의 스콜처럼 짧지 않은 비는 아침부터 퍼붓기도 하고 밤새 내리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내리쬐며 젖은 몸을 말려준다. 비가 오면 비릿한 풀냄새와 청명한 공기에 눈이 시리다. 건기를 겨우 버텨온 나무와 풀들은 단물을 품은 지 이틀 만에 새로운 풀을 돋아낸다. 나무는 한 뼘쯤 커져 온 거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여놓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먼지 풀풀 날리는 마른 맨땅 어디에 씨를 숨겨두고 있다가 비가 내리자마자 생명을 이어갈까! 지난해 10월에도 보름쯤 늦게 찾아온 비는 모두에게 생명의 단비가 돼주었다. 서울처럼 중금속이 함유된 미세먼지가 아니어서 원주민들은 처마 밑에서 비를 긋거나 맞고 다닌다. 비가 오면 아이들이 뛰어나가 비를 맞거나, 장화를 신고 걸으며 물 튀기는 장난을 친다. 산성비가 아니니 씻으면 그뿐이라 말리지도 않는다. 문밖을 나서면 진흙투성이의 흙길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아이들은 비에 젖은 보드라운 흙을 발바닥에 덩어리째 붙이곤 드넓은 대지 위를 캔버스 삼아 진흙놀이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집 마당에 들어선 순간, 천지가 흙덩이다. 발자국을 찍으며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과 달리 정돈된 도시 생활의 타성이 붙은 나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편리함과 순수한 자연이 공존하기는 사다리의 평행선처럼 만날 수 없거늘 그래도 늘 꿈꾸는 것이 인간인가보다 한다.

새들의 노래와 햇빛과 달콤한 새벽

이런 날은 뜨끈한 찌개가 먹고 싶다. 고기를 끊인 뒤 서울서 가져온 된장 한 스푼을 넣어 보글보글 끓이다가 맛은 다르지만 애호박 비슷하게 생긴 것을 숭숭 썰어넣고 서울을 생각하며 밥에 비벼 먹는다.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면 서울 우리 집 천장의 정돈된 무늬가 생각난다. 하루도 늦지 않고 고지서가 날아오는, 하지만 익숙한 서울 생활이 그립다가도 아루샤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서울을 잊는다. 바람이 새벽을 깨우고 새들의 목소리가 아침을 부르고 태양의 강렬함이 나를 눈뜨게 한다. 물론 돌아서면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쓸어야 하고 새들의 냄새나는 똥도 치워야 하고 강한 햇빛을 피해 문에는 두꺼운 커튼도 달아야 한다. 조금은 익숙해진 바람에, 새들의 노래에, 그리고 햇빛에, 이제는 나뭇잎도 새들의 똥도 그냥 내버려두고 새벽을 위해 차라리 밤에 일찍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아프리카에 익숙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