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첫기억
우리집 우물은 네 가구가 나눠 먹는 물이다.
맨처음 새벽에 물을 긷기 위해 아낙네들은 경쟁을 한다.
시멘트로 사각의 벽을 두른 것이 1971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적혀 있다.
내 나이 다섯살 때인데 나는 이 우물이 검은 나무테두리였던 때가 생각난다.
우물속에는 고사리종류의 풀이 자라고 있었고 나무테두리사이로 아기 하나는 빠질 정도의 간격이었던 것이 기억 나는데 시멘트벽에 1971년이라고 적혀 있으니 그 이전 기억임에는 틀림없다.
정월 대보름에는 두레박에 쌀을 담고 그 속에 촛불을 세워 밤새도록 타게 두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 줄은 모르나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집만의 풍속으로 용을 숭배하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조상과 자손에 대한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어머니도 아버지도 근엄한 표정으로 불을 켜서 담그어 두고 새벽에 꺼지기 전에 아무도 모르게 정리하던 일이 기억난다.
어릴 때는 우물 속에 들어가 보는 게 자라는 증거였다. 가랭이를 벌려야 겨우 사방의 벽 돌에 닿을 수 있었으므로 열 살은 넘어야 들어 갈 수 있었지 싶다.
일년에 한 번은 우물 청소하는 날이다. 물이 마르는 법이 없으므로 온 동네 사람이 다 나와 재빠르게 계속 퍼내야 물을 다 퍼올릴 수 있어서 모두가 매달렸던 일이다. 동전도 나오고 우물집집게미(지킴이) 메기도 다 건져 내고서야 그 일이 끝났다. 바닥에 쌓인 각종 찌끄러기들을 다 건져내고 살아 있는 집집게미들은 다시 넣어 주고 맑은 물이 차 오르면 그 일이 끝났다.
여름에는 오이, 수박, 참외같은 것은 당연히 우물속이 보관 장소였다. 오이정도는 각자 집에서 먹었지만 수박이나 참외는 온 동네 사람이 다 나누어 먹었다. 우물물은 겨울에는 따뜻했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을 수 있고 물동이를 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물을 나르는 일이 아이들 몫이다. 처음에는 한 두레박이지만 차차 두 두레박, 세 두레박씩 올라갔고 네 두레박을 담으면 한 동이가 가득찼고 찰랑찰랑한 동이를 이고 집에 와서 부엌에 있는 두멍에 담으면 끝이다. 네가 두 두레박을 나를 수 있을 때, 욕심을 내다 물동이를 떨어뜨려 발목 복숭아뼈를 다쳤다. 물동이는 함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아래쪽에는 쇠로 테를 둘렀는데 그 쇠테가 복숭아뼈를 긁은 것이었다. 그래도 물을 계속 길으러 다녔는데 어른들의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도 나는 인정병에 좀 걸려 있었던가 싶다.
남자들은 물지게로 져 날랐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물지게는 동이 두 개를 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 긷는 일에 남녀 차별은 없었고 남자 아이들이 힘이 더 셋으므로 남자들이 있는 집은 물긷는 일은 주로 남자들 몫이다. 누구든 물 두멍에 물이 비어 있으면 채워 두어야 했다. 먹는 물과 요리하는 물을 빼고 허드렛 물을 쓰는 일은 거의 우물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우물 옆에는 미나리가 있어 어느정도 자라면 누구든 지 베 가서 요리를 했다. 매일 미나리를 먹지는 않기 때문에 네 가구가 먹고도 남았다.
우물 옆에는 늙은 대추나무가 있었다. 시집간 왕고모들이 어릴 때 그네를 메고 놀았다는 걸로 보아 족히 백년은 넘었던 듯 싶다. 그 나무에 올라가 우물을 들여다 보는 것이 재미 있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계집애가 나무에 올라간다고 기겁했지만 나는 가끔 그 나무에 올라갔다. 어릴 때 나는 지독한 말괄량이였다. 남자애들이 하는 거의 모든 장난은 내가 더 앞장섰으며 엎집 아재(나이는 동생보다 적다), 남동생과 남동생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좀 빨리 글자를 배웠다고 엉터리로 적어 놓고는 맞다고 우기기도 많이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늙은 대추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마을 이름만 적고 우물옆 큰 대추나무집이라고 주소를 썼는데 연락이 닿았다는 이야기다. 친척 중 어떤 사람이 6.25동란통에 먹고 살기 무척 힘들었는데 마누라가 먼저 죽었다고 한다. 술에 취해 안강 어디선가에서 어린 일고여덟살 아들의 손을 놓쳐 버렸단다. 아이는 전북 김제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로 가서 거의 고아처럼 동네 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장가도 들고 아이들도 생겼는데 자신의 고향생각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동네이름과 우물옆 대추나무만 생각났다고 한다. 실제로 살았던 집은 우리집과는 좀 떨어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연락이 되어 내외가 방문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친 아들처럼 반기고 온 동네 사람들이 잔치집처럼 환영 해 주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있고 한 참 뒤, 고등학교 때 전국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그 시절에는 마을마다 집안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듯 싶다. 그 당시만 해도 마을에 친척들이 여러 집 있어 가까운 촌수대로 이집저집 인사를 다니고 오래된 족보책을 내 놓고 조목조목 가르치고 아이들 이름을 다 정리하였다. 촌수로는 거의 열촌인지 열두촌인지 그랬던 것 같다. 다음해 부터는 오빠들과 언니, 동생들이 일년에 한 번씩은 다녀 갔다. 동생 중 한 명은 조정선수이고 오빠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조정이라는 종목을 알게 되어 신기했고 전라도 사람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전라도 말은 참 재미있게 들렸다. 지금은 서울 어디서 산다고 들었다.
우물은 아직도 우리집 앞에 서 있다.
대추나무는 빗자루병이 들어 이 가지 조금, 저가지 조금 자르면서 자꾸 줄어들다가 둥치만 서 있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지금 같으면 멋진 조각목으로 살려 낼 수 있었을 텐데 불쏘시개로 사라져 버렸다.
우물물은 수도를 끌어 들여 여전히 물을 쓰고 있다. 상수도가 설치되어 마당에서 허드렛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물맛은 동네에서 워낙 농약도 많이 치고 거름도 많이해서 오염되어 그런 지 예전만 못하다. 그냥 먹어도 될 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가끔 먹어 본다.
한 우물물 먹던 사람들 이야기를 연재로 적어 볼까 한다. 내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기 때문이다.
유년기 초기 기억이 될 것이다(처음 기억부터 중3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