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콩농사 거들기
우리동네는 콩 농사를 많이 짓는다.
지금도 명품된장인 하사리된장으로 유명하고
또 영일기업이란 곳에서 된장공장도 만든다고 들었다.
콩은 겨울동안 예쁘고 잘 생긴 콩을 골라낸다.
벌레 먹거나 찌그러진 콩은 구별하고 그저그런 동그란 콩들은 내다 팔고
찌그러지거나 벌레 먹은 놈들은 불려 놨다가 갈아서 두부 만들고
삶아서 메주 만들고 그런 용도로 쓰여진다.
겨우네 조용한 날은 방안에서 동그란 양은 상에 콩을 미끄럼틀 태우면서 골라내는 재미가 좋았다.
나는 이 일도 정말 많이 거들었다.
그렇게 제일 잘 생기고 알이 굵은 놈들이 바로 씨앗이다.
이 방법이 신석기 혁명 이래로 조상대대로 전해 져 오는 유전적인 혁신 방법이다.
이 기술을 누구에게도 전수해 주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시는 마지막 농부 아버지를 애달파한다.
날씨가 따뜻해 지고 감자를 심고 감자 싹이 밭에 우거질 무렵 정도가 되면
감자 고랑에 콩을 심는다.
간격은 어른 손 한 뼘간경으로 반드시 세 알을 넣어야 한다.
한 알은 땅 벌거지들이 먹고, 또 한 알은 날 짐승이 먹고
한 알은 싺이 트면 인간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세 개를 심는다.
보리나, 밀 밭 고랑에도 같은 방식으로 심는다.
싹이 나면 어떤 때 가물면 가물에 콩 나듯이라는 말이 있듯이 띄엄 띄엄 싹이 난다.
새들이 많이 뜯어 먹거나
벌레가 많이 먹어도 띄엄띄엄 나게 된다.
그럴 때는 싹이 손가락 정도 크기 만큼 자랐을 때 다른 여분을 모아서 옮겨심는다.
이식한다고 그러는데 엄마가 모종을 캐고 나는 주전자를 들고 따라 다닌다.
호미로 구멍 만들고 콩 모종 넣고 물주고 다시 덮고
엄마와 나는 환상의 콤비가 되어 모종을 한다.
그 다음은 감자를 캐내면서 밭을 맨다.
감자 캘 때는 밭 매기도 추수의 기쁨으로 즐거운 작업이다.
여름이 되고 비가 많이 내리고 풀은 자꾸 자라고
약간만 매 줄 시기를 놓치면 그냥 산이 되어 버린다.
산이 되어버린 콩 밭을 매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아이들도 한고랑, 어른들도 한 고랑 더러는 높도 하고 콩밭도 참 많이 맸다.
나는 어른들 속도를 다라 가지 못해 풀을 대충 흙으로 덮어 버린다.
아버지도 나처럼 대충대충이다.
엄마는 꼼지락거리면서(점향이 일하는 방식-아주 완벽하다) 말끔하게 맨다.
금방은 표시가 나지 않지만 비가 한 번만 오면 내가 맨 고랑, 아버지가 맨 고랑은 금방 풀이 자란다.
엄마가 맨 고랑은 표시가 난다. 밭머리도 깔끔하고 두둑까지도 깨끗하다.
엄마는 콩은 북만 잘 도와 주면 열매는 내가 맺을께라고 콩이 말을 한다라고 그런다.
나더러 대충대충 하지 말고 북을 많이 돋아 주라는 말이다.
물론 가을에 열매 맺는 량도 엄마꺼랑 아뻐지꺼랑 내꺼랑은 차이가 날 것이다.
늦 가을이 되면 콩을 추수하고 볏가리를 만들어서 둔다.
어느 정도 추수가 끝나면 콩 타작을 한다.
타작을 하면 이 콩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서
타작 마당을 정리하고도 온 마당이 콩 투성이다.
제법 날씨가 춥고 아침 저녁으로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추운데
엄마는 바가지를 하나 주면서 콩을 주우라고 한다.
그러면 또 신이 나서 콩을 한 바가지씩 줍는다.
대체로 물에 불려져 있기 때문에 이건 며칠 동안 콩밥 재료가 된다.
물론 닭들을 풀어 놓아 기르기 때문에 이것들은 다 닭에게 진수성찬이 된다.
엄마는 밥을 먹을 때마다 우리들(후균이, 나, 점향이, 남교)에게
우리들의 수고로 맛있는 밥을 먹는다고 장광설 칭찬을 늘어 놓는다.
우리들은 서로 왁짜지껄 떠들면서 콩을 서로 먹겠다고 떠들어 대고...
아 맛있고 정겨운 밥상이구나. 그리워라. 그 대로 돌아가고 싶구나.
콩은 다시 긴 긴 겨울 동안 갈무리되어 메주가 되고, 된장이 되고, 명절 전 날은 두부가 된다.
그 모든 일상의 중심에 엄마가 있다.
행복했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