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눠 읽을만한 책 소개
[스크랩] 소홀이 생각지 않았으나 / 박남준
햇살수풀
2007. 3. 5. 21:56
소홀히 생각지 않았으나
글/사진·박남준
깁고 기워 해묵은 것 낡은 수첩을 바꾼다 거기 이미 지워져 안부가 두절된 이름과 건너뛰어 다시 옮겨지지 않는 이름과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닌 이름들이 있다 이 밤, 누군가의 기억에도 내 이름 지워지고 건너뛰고 붉은 줄 죽죽 그어질 것이다
- <정리된 사람>
작은 수첩에 이름과 함께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넣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러 더는 수첩에 남아있는 여백이 없을 때 너덜너덜한 그 수첩을 새것으로 바꿔 옮기며 들여다보다가는 줄이 그어진 이름과 건너뛰어야 할 이름들을 보면서 짧지 않은 세상을 살며 만나는 무상한 인연의 고리를 생각해보던 날이 있었다.
며칠 전, 다시 또 한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지웠다. 예전에는 벗들의 결혼식이나 그이들의 아이를 위해 벌이는 잔칫집에 가는 일이 잦았는데 이제는 지인들의 부모나 당사자의 죽음을 받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와 같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일과 다름 아닐 것이다. 편안한 평지의 길을 걸어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때로 능선에 앉아 더운 땀을 식히고 다시 또 정상을 향해 거친 숨을 토하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러 힘겹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산중턱에 주저앉아 되돌아가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예 처음부터 산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멀리서 바라보며 발길을 되돌리기도 할 것이다. 산의 내리막길에서 어떤 이는 쉬엄쉬엄 바람소리, 물소리와 보이는 풍경들에 그립고 설레거나 안타까운 안부의 눈길을 주기도 할 것이며 마음의 고요에 새기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시간에 쫓기거나 내기경주라도 하듯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태어나서 늙고 때로 병들며 죽는 일, 생로병사가 그러할 것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스님인 운서 주굉의 《죽창수필》을 새롭게 추린 책 《산색》에는 ‘부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음을 들으면 사람은 누구나 크게 놀란다. 이것이 비록 세상의 상정이기는 하지만,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 또한 세상의 상사여서 이제까지 아무도 이를 비켜 간 사람이 없으니 무엇이 새삼 놀랄 만한 일이겠는가.
다만 헛되이 살다 부질없이 죽어가면서 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놀랄 만한 일이건만, 이 일에는 오히려 태연하여 전혀 놀라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산색》에서
삶과 죽음의 교차가 순간이라지만 오십의 나이를 살아왔는데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사랑하는 이라면, 그 가족이라면, 갑작스러운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 주검 위에 또 한 주검이 겹쳐지며 그 주검 위에 다른 생명의 기운이 흘러들고 움터서 비로소 떠나보내기까지 많은 날들이 흐를 것이다.
바쁘게 살아왔구나. 도시를 떠나 산골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몸만 옮겨왔을 뿐, 번다한 삶을 살기로는 크게 다를 바가 무에 있는가. 마음을 멀리 두어 쉬지 않고 흐르는 부단의 강물처럼 매이지 않게 두거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듯 보이나 먼 산처럼 본디 근원을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일이라니,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가 사는 악양 집에 왔다 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한 번쯤은 경험해보는 일이 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방을 들락거리다 쿵 하고 벽이 흔들거릴 정도로 강도가 크게 이마나 머리를 찧는 일이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궁궐 같은 집들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방으로 들고나는 문의 높이가 낮다. 지붕이 낮으니 문 또한 높이를 그에 맞게 해야 했을 것이며 추운 겨울철 보온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이 낮은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해본 것 가운데 한 가지, 그것은 겸손과 공경의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손님들에게는 겸손의 도리를, 주인에게는 공경의 몸가짐을 삶에 배게 하려는 건축의 철학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집이 다만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며 음식과 잠자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듯 문이 이쪽과 저쪽으로 오고가는 통로와 경계를 닫아거는 빗장으로서 역할만은 아닐 것이다.
요즈음이야 경제력에 따라 크기가 다를 뿐 똑같은 아파트와 그러한 구조물들에서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집에 대한 철학이나 그 집안의 문에 대한 인식이 달리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긴 나도 이왕이면 문이 높아서 머리를 찧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삼 년을 넘어 사 년째 살고 있는 집의 낮은 문을 들고 나며 아직도 나는 가끔 이마나 머리에 혹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마다 스스로의 몸가짐에 대해 생각한다. 너 요즈음 너무 경망되이 우쭐거리고 있었구나.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 그나마 겨우 중간은 가느냐.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냐. 악취가 나는구나.
무상이 신속한 이치는 노소에 차이가 없다. 젊은이는 그래도 앞날이 창창하므로 오래 살기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늙은이라면 분명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저 무상이 아침에 이를지 저녁에 이를지를 생각하지 말고, 세상일에 대해 훌훌 손을 털어 전혀 얽매임이 없이 하라. 이것이 늙마에 간직해야 할 매우 긴요한 법문이다.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산색》 에서

서울의 상가에 갔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며칠 동안 불을 지피지 않은 방바닥에 냉기가 풀풀거린다. 옷을 갈아입고 뒤안으로 나가 피죽으로 사온 나무들을 톱질하는데 어디선가 솔솔거리며 달짝지근한 냄새가 난다.
어디서 나는 것이지. 코를 킁킁거렸다. 기억에 있는 냄새가 분명한데 어떤 기억이지. 봄날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과 뿌리를 캐서 씹으면 단물이 입안 가득 고이던 말밥이라고 부르던 띠풀 종류의 풀이 겨울에도 죽지 않고 파란 잎을 내고 있었다. 톱질을 하던 내 발 밑에 밟혀서 으깨지며 까마득히 어린 날 이 풀을 뽑으면서 피워 올리던 아련한 초록의 냄새를 수채색 물감처럼 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미안하다. 잘 보이지도 않고 내가 게을러서 미리 땔감을 잘라두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졌네. 그건 그렇고 따뜻한 봄에나 다시 나올 일이지 무슨 미련이나 볼일이 남아있다고 이 추운 겨울 아직껏 푸른 목을 빼고 이렇게 있는 것이냐.’
삶이 어찌 시간을 기약하며, 순리대로만 살아질 수 있을까. 지난 초겨울 강원도 장평의 자작나무 숲에 앉아 잠시 떠올랐던 생각 하나, 그때 나는 그랬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가 비창의 악상을 떠올렸을, 톨스토이가, 토스토예프스키가, 고리키가 햇살 아래 걷거나 혹은 앉아 오래 사색하였을 이 자작나무 숲에 들어 아직 뽑지 않은 텃밭의 무와 배추가 얼지는 않았을까, 무서리가 저리 내렸는데 눈발이 흩날리는데 하며 북쪽 강원도와 남쪽 지리산의 경계를 넘나드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 자작나무 숲에서 명색이 시인이라는 작자가 한편의 시를 위한 사색이나 이 숲이 건너온 지나온 날들과 나무에 기대어 나무들이 들려주는 고요한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동치미와 김장거리를 생각하며 겨울나기를 걱정했던 것이다.
대한 지나 벌써 입춘인가. 매화꽃 봉오리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무상하다. 이렇게도 시위를 떠난 쏜살 같다니. 겨울 밤, 나뭇가지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별빛들이 도심의 가로수들에 장식으로 걸어놓은 작은 알전구처럼 밤하늘에 반짝인다. 이 밤, 또 누군가의 별이 밤하늘을 길게 가르며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깊이, 혹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얼굴로 져 갈 것이다.
글/사진·박남준
깁고 기워 해묵은 것 낡은 수첩을 바꾼다 거기 이미 지워져 안부가 두절된 이름과 건너뛰어 다시 옮겨지지 않는 이름과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닌 이름들이 있다 이 밤, 누군가의 기억에도 내 이름 지워지고 건너뛰고 붉은 줄 죽죽 그어질 것이다
- <정리된 사람>
작은 수첩에 이름과 함께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넣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러 더는 수첩에 남아있는 여백이 없을 때 너덜너덜한 그 수첩을 새것으로 바꿔 옮기며 들여다보다가는 줄이 그어진 이름과 건너뛰어야 할 이름들을 보면서 짧지 않은 세상을 살며 만나는 무상한 인연의 고리를 생각해보던 날이 있었다.
며칠 전, 다시 또 한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지웠다. 예전에는 벗들의 결혼식이나 그이들의 아이를 위해 벌이는 잔칫집에 가는 일이 잦았는데 이제는 지인들의 부모나 당사자의 죽음을 받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와 같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일과 다름 아닐 것이다. 편안한 평지의 길을 걸어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때로 능선에 앉아 더운 땀을 식히고 다시 또 정상을 향해 거친 숨을 토하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러 힘겹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산중턱에 주저앉아 되돌아가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예 처음부터 산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멀리서 바라보며 발길을 되돌리기도 할 것이다. 산의 내리막길에서 어떤 이는 쉬엄쉬엄 바람소리, 물소리와 보이는 풍경들에 그립고 설레거나 안타까운 안부의 눈길을 주기도 할 것이며 마음의 고요에 새기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시간에 쫓기거나 내기경주라도 하듯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태어나서 늙고 때로 병들며 죽는 일, 생로병사가 그러할 것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스님인 운서 주굉의 《죽창수필》을 새롭게 추린 책 《산색》에는 ‘부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음을 들으면 사람은 누구나 크게 놀란다. 이것이 비록 세상의 상정이기는 하지만,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 또한 세상의 상사여서 이제까지 아무도 이를 비켜 간 사람이 없으니 무엇이 새삼 놀랄 만한 일이겠는가.
다만 헛되이 살다 부질없이 죽어가면서 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놀랄 만한 일이건만, 이 일에는 오히려 태연하여 전혀 놀라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산색》에서
삶과 죽음의 교차가 순간이라지만 오십의 나이를 살아왔는데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사랑하는 이라면, 그 가족이라면, 갑작스러운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 주검 위에 또 한 주검이 겹쳐지며 그 주검 위에 다른 생명의 기운이 흘러들고 움터서 비로소 떠나보내기까지 많은 날들이 흐를 것이다.
바쁘게 살아왔구나. 도시를 떠나 산골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몸만 옮겨왔을 뿐, 번다한 삶을 살기로는 크게 다를 바가 무에 있는가. 마음을 멀리 두어 쉬지 않고 흐르는 부단의 강물처럼 매이지 않게 두거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듯 보이나 먼 산처럼 본디 근원을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일이라니,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가 사는 악양 집에 왔다 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한 번쯤은 경험해보는 일이 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방을 들락거리다 쿵 하고 벽이 흔들거릴 정도로 강도가 크게 이마나 머리를 찧는 일이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궁궐 같은 집들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방으로 들고나는 문의 높이가 낮다. 지붕이 낮으니 문 또한 높이를 그에 맞게 해야 했을 것이며 추운 겨울철 보온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이 낮은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해본 것 가운데 한 가지, 그것은 겸손과 공경의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손님들에게는 겸손의 도리를, 주인에게는 공경의 몸가짐을 삶에 배게 하려는 건축의 철학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집이 다만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며 음식과 잠자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듯 문이 이쪽과 저쪽으로 오고가는 통로와 경계를 닫아거는 빗장으로서 역할만은 아닐 것이다.
요즈음이야 경제력에 따라 크기가 다를 뿐 똑같은 아파트와 그러한 구조물들에서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집에 대한 철학이나 그 집안의 문에 대한 인식이 달리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긴 나도 이왕이면 문이 높아서 머리를 찧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삼 년을 넘어 사 년째 살고 있는 집의 낮은 문을 들고 나며 아직도 나는 가끔 이마나 머리에 혹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마다 스스로의 몸가짐에 대해 생각한다. 너 요즈음 너무 경망되이 우쭐거리고 있었구나.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 그나마 겨우 중간은 가느냐.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냐. 악취가 나는구나.
무상이 신속한 이치는 노소에 차이가 없다. 젊은이는 그래도 앞날이 창창하므로 오래 살기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늙은이라면 분명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저 무상이 아침에 이를지 저녁에 이를지를 생각하지 말고, 세상일에 대해 훌훌 손을 털어 전혀 얽매임이 없이 하라. 이것이 늙마에 간직해야 할 매우 긴요한 법문이다.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산색》 에서

서울의 상가에 갔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며칠 동안 불을 지피지 않은 방바닥에 냉기가 풀풀거린다. 옷을 갈아입고 뒤안으로 나가 피죽으로 사온 나무들을 톱질하는데 어디선가 솔솔거리며 달짝지근한 냄새가 난다.
어디서 나는 것이지. 코를 킁킁거렸다. 기억에 있는 냄새가 분명한데 어떤 기억이지. 봄날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과 뿌리를 캐서 씹으면 단물이 입안 가득 고이던 말밥이라고 부르던 띠풀 종류의 풀이 겨울에도 죽지 않고 파란 잎을 내고 있었다. 톱질을 하던 내 발 밑에 밟혀서 으깨지며 까마득히 어린 날 이 풀을 뽑으면서 피워 올리던 아련한 초록의 냄새를 수채색 물감처럼 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미안하다. 잘 보이지도 않고 내가 게을러서 미리 땔감을 잘라두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졌네. 그건 그렇고 따뜻한 봄에나 다시 나올 일이지 무슨 미련이나 볼일이 남아있다고 이 추운 겨울 아직껏 푸른 목을 빼고 이렇게 있는 것이냐.’
삶이 어찌 시간을 기약하며, 순리대로만 살아질 수 있을까. 지난 초겨울 강원도 장평의 자작나무 숲에 앉아 잠시 떠올랐던 생각 하나, 그때 나는 그랬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가 비창의 악상을 떠올렸을, 톨스토이가, 토스토예프스키가, 고리키가 햇살 아래 걷거나 혹은 앉아 오래 사색하였을 이 자작나무 숲에 들어 아직 뽑지 않은 텃밭의 무와 배추가 얼지는 않았을까, 무서리가 저리 내렸는데 눈발이 흩날리는데 하며 북쪽 강원도와 남쪽 지리산의 경계를 넘나드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 자작나무 숲에서 명색이 시인이라는 작자가 한편의 시를 위한 사색이나 이 숲이 건너온 지나온 날들과 나무에 기대어 나무들이 들려주는 고요한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동치미와 김장거리를 생각하며 겨울나기를 걱정했던 것이다.
대한 지나 벌써 입춘인가. 매화꽃 봉오리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무상하다. 이렇게도 시위를 떠난 쏜살 같다니. 겨울 밤, 나뭇가지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별빛들이 도심의 가로수들에 장식으로 걸어놓은 작은 알전구처럼 밤하늘에 반짝인다. 이 밤, 또 누군가의 별이 밤하늘을 길게 가르며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깊이, 혹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얼굴로 져 갈 것이다.
출처 : 자유로움 맑음
글쓴이 : 자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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